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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꽃의 애잔함
오늘 , 추석 전에 쓴 편지를 두 통 한꺼번에 받았다. 추석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집안 모습이 정겹구나. 그런 분위기를 맛본 지가 얼마나 되는지
아득하다. 연휴가 갈수록 감옥은 더욱 지루한 법, 추석 명절이라고 나오는
흰쌀밥은 눅은 내가 나서 몇 숟갈 뜨다 말았다. 비축미거든. 차라리 평소에
먹던 보리밥이나 따끈하게 해서 나오지........
며칠 만에 운동장에 나오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꽃밭의 야생초들은
가을걷이하느라 벌써 후줄근한 반면, 땅바닥엔 철모르고 싹튼 새싹들이
새파랗게 돋아나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쪽 편엔 참외꽃이 앙증스럽게
피어 있는데, 자세히 보니 꽃 떨어진 곳에 콩알만 한 열매도 맺혀 있더라구.
꽂밭 옆에 하수도가 터져서 질질 흐르고 있는데, 아마 재소자들의 대변을
통해 참외씨가 떨어져 싹이 튼 모양이야. 개굴창 여기저기 돋아난 그놈들을
꽃밭에 옮겨 놓았더니 노랗게 꽃을 피운 게야.
인간의 내장 속을 굽이굽이 떠다니다가 철이 다 지나서야 꽃을 피운 노랑참외.
그놈 참, 어떻게 보면 기구한 운명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냥 똥구덩이로
휩쓸려 들어가 썩어 버린 동료들에 비해 엄청 호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좌우간
이 가을에 들여다보는 참외꽃은 그 경이로움보다도 애잔함에 더 가슴이 저미는
것 같다.
선아, 내 방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니? 궁금하고 자시고도
없다. 한 평 공각의 절반을 길게 쪼개서 한쪽은 잠자리로 쓰고 다른 한쪽은
책무덤으로 쓰고 있으니까. 그 한쪽에 그림도구와 화판이 있는데, 그걸 펼쳐
놓으면 방안에서 궁뎅이도 못 돌린단다. 그림을 그리건,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건, 밑줄을 쳐가며 책을 읽건 간에 한자리에 앉아서 필요한 모든 것이 팔 한번
뻗어서 닿는 거리에 있지. 모든 게 한 팔 거리 안에 있으므로 제자리에 한번
앉으면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볼일을 다 본다는 거지. 지금 이 말이 뭐 대수
로운가 하겠지만, 밖에 나가 보면 이게 걸리는가 보다.
지난 광복절에 출소하신 선생님 한 분이 편지를 보내 왔는데, 집에 들어가서
처음엔 물건을 찾으러 이방 저방 다니고 왔다갔다 하는 게 너무도 이상했다는
거야. 이십 년을 팔 닿는 거리에 물건을 두고 생활하다가 갑자기 넓어진 공간에서
물건을 찾아 왔다갔다하는 게 너무도 낯설었다는 거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극미와 극대의 세계만이 있는 거야. 극미의 세계는
독방 속의 지리한 일상들이고, 극대는 징역 밖의 그리운 이들과 세상 소식들이지.
중간이란 게 없어. 극미와 극대만을 체험하는 사람은 성격도 그와 비슷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은 일에 지극히 소심하게 집착하는가 하면 터무니 없는
큰 꿈을 품기도 하고, 나한테서 혹시 그런 것 느끼지 못하겠니? 그러기에 우리
수인들에게 있어 이 편지하는 행위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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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안해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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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안해님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