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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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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이엄마 |
제목 : |
야생초편지 - 16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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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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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안에서 살살 녹는 밤
밥 때가 되었는데 아직 밥이 올 생각을 아니 하는구나. 허기를 조금이라도 달래 볼까
하고 낮에 받아서 남겨 두었던 삶은 밤을 하나 들어 이빨로 반으로 쪼갠다. 웬 밤이냐구?
오늘은 개천절이라 아침에 보리 섞은 밥 대신 흰쌀밥이 나오고 점심에 삶은 밤 몇 알이
특식으로 나왔단다. 먼저 앞니를 사용하여 대충 갉아먹은 다음 숟갈로 마저 퍼 먹는다.
보통 숟갈은 커서 잘 안 되니 조그만 것을 찾아본다. 지난 8.15 광복절 때 특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때 퍼먹고 버리지 않고 둔 조그마한 플라스틱 숟가락이
있거든. 교도소에서는 모든 물자가 귀하다. 이런 작은 숟갈에서부터 먹고 남은 컵라면
용기까지 함부로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여러가지 용도로 쓴단다. 당장은 쓰지 않아도
갖고 있으면 언젠가 쓰게 마련이지. 플라스틱 숟갈은 지금 밤을 퍼 먹는데 쓰잖니?
이렇게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자꾸 쌓아 두다 보면 한 평도 못 되는 방이 점점 좁아진다.
그래서 날 잡아서 사용 빈도가 아주 낮은 것부터 추려서 버린단다.
쓸모 있는 것을 잘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쓸모없는 것(실제론 없지만)을 잘 버리는 것도
징역을 요령 있게 사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자기 방의 짐의 총량은 들어오고 나가고 해서
항상 일정하기 마련이지. 그래도 오래 살다 보면 짐이 자꾸 늘어나서 한계를 넘기도 하지.
나는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이 물건 하나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 자라서인지,
아무리 하잘것없는 물건이라도 함부로 버리질 못하겠더라. 요즘 젊은애들이 양말이나
빤스를 몇 번 입고 더럽다고 막 버리는 것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정말이지
교도소에서 물건 버리는 것을 보면 겁이 날 정도다. 짬밥 버리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자원
이 낭비되고도 이 사회와 자연이 온전할까를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흔들어 진다.
나는 옛날에 자취할 때도 그랬지만 이담에 나가서 살게 되면 부득이한 경우를 빼고는 살림
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거나 재활용품을 사용할 것이다. 이미 이십대 젊은 시절
부너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어려울 게 전혀 없을 거야. 미국에서 자취할 때도
생활에 필요한 것을 거의 모두 길거리에서 줍거나 중고품 시장에서 사곤 했지. 또 내가
무엇이든 스스로 만들어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다 만들어 쓸 거야.
어떻게 보면 나 같은 사람은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 환영받지 못할
사람이지. 그러나 나는 자본주의의 낭비로부터 거저먹고 사는 법을 알고 있으니 자본주의를
욕할 수도 없지. 아무튼 소비를 으뜸으로 여기는 이런 형태의 사회는 무한정 계속될 수 없을
것이다. 지구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 아까 밤 까먹는 얘기 하다가 엉뚱하게 자본주의 얘기로 빠지고 말았네. 이 안에서 밤은
어쩌다 먹어 보는 귀한 것이라서 밤 부스러기가 행여 헛군데로 떨어질까 사뭇 조심하면서
작은 숟갈로 긁어 먹는다. 밥 먹기 전이라 배가 고파 그런지 입에 들어간 밤이 살살 녹는 게
맛이 기가 막히다. 언뜻 보기에 다 먹은 것 같아도 다시 붙들고 숟갈로 구석구석 긁어 보면
밤이 마치 대팻밥처럼 꽤 나온단다. 알뜰하게 긁어 먹고 물을 한잔 마시며 입맛을 다신다.
그러구 보면 맛이란 것은 음식 자체에서라기보다 허기와 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적당히 배가 고프고, 음식을 만드는 정성과 먹는 정성이 합쳐지면 어떤 음식
이라도 맛이 있을 거라는 거지. 그러고 보면 젊은 시절 내가 집에 있을 적에 왜 그리 밥을
먹기 싫어했는지 이해가 간다. 먹을 것 귀한 줄 모르고 마음이 닫혀 있으면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선아, 오늘 개천절 하루 어찌 지냈는지? 오늘 같은 날 가족들과 함께 밤나무 농장에라도
가서 밤 따기 시합을 벌이면 얼마나 좋겠니? 저녁엔 따온 밤을 푹 삶아서 다 함께 까먹고,
내가 나가면 꼭 그렇게 해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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