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다연이엄마 제목 : 야생초편지 - 17
조회 :  
1247
 
     
야초차에 탐닉하다





현미(玄微), 차에 통달한 옛 사람이 있어 아득하고 미묘한 차의 맛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더구나. 어쩌면 이 표현도 억지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어찌 필설로 그 심심미묘한

자리를 나타낼 수 있겠느냐.




징역에 앉아서 차 맛을 알았노라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할 게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녹이 벌건 수돗물을 연탄불에 펄펄 끓인 뒤 그것으로 척박한 교도소 운동장

에서 키운 야생초 이파리를 울궈먹는 것이니 현미(玄微)는 커녕 경박(輕薄)이란 말로도

적절치 않다 할 거다. 사실이 그래. 이곳에선 다도(茶道)를 음미할 만한 요소를 단 하나

도 갖출 수가 없어. 사실 6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땐 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대전교도소에서 퀴퀴하기까지 한 수돗물만 마시다가 여기에 오니 물맛이 마치 미네랄

워터 처럼 싱싱하더라구. 그래서 모두들 생수라면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셔 댔지.


그러나 그 좋은 시절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년 남짓 지나니 소독약 냄새가 점점 짙어

지면서 근래엔 녹물이 엄청나게 나오는 게야. 어느 정도냐 하면, 수도꼭지를 적어도 5분

이상 틀어 놓은 물도 흰 그릇에 받아 하룻밤만 그대로 두면 벌건 녹이 가라앉을 정도지.

이놈의 녹물 땜에 진저리가 난다. 우리 몸에 산화철이 어느 정도 쌓이면 부작용이 일어날까

하는 것이 요즘의 내 관심사란다. 좌우간, 나는 이런 물을 끓여서 찻물로 사용하고 있다.

다구(茶具)로는 교도소 지급품인 노란색 알루미늄 주전자와 노란색 플라스틱 컵을 쓰고.

이런 형편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 입에서 다도란 말이 나오리라 기대할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편지의 서두에 현미(玄微)!라고 운을 떼었다. 오늘 한 잔의

차를 마시고 나도 모르게 떠오른 말이지.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그저 기억해 낸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내 입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온몸의 감각이 그 말을 저절로

떠오르게 한 거야. 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려본다. 다도의 형식과

조건을 갖출 수 없는 곳에서라도 성(誠)과 정(情)으로써 다도를 즐길 수 있노라고.

이런 말이 있다. 배고픔이야말로 최고의 식욕이라는. 거친 음식일지라도 배가 고플 때는

아주 맛있게 느껴지는 법. 이와 마찬가지로 정갈치 못한 물과 재료로 끓인 차일지라도

갈급한 자에겐 그것이 최고의 차인 걸 어쩌리!




각설하고, 요즘 내가 즐겨 마시는 차에 대해 잠깐 말해 줄게. 전에는 단순히 끓인 물에

말린 쑥이나 꿀풀 잎을 우려먹었는데, 요즘엔 복도에 난로가 놓인 덕분에 좀 다양하게

끓여 먹을 수 있게 되었단다.


최근 개발하여 심심히 음미하고 있는 차는 이렇게 만든다. 먼저 바짝 말린 국화꽃 대여섯

송이와 산국꽃 한두 송이, 그리고 아니스 씨앗 두어 개(지난번 사회참관 갔을 적에 절에서

스님이 갈무리해 둔 것을 슬쩍해 왔는데 향기가 기가 막힘)를 망사주머니에 넣고 주전자에

물을 서너 컵 넣어 끓인다. 한 번 팔팔 끓으면 난로 뚜껑을 덮고 좀 약한 불로 뭉글하게

20분 정도 더 끓인다. 다 끓으면 한 컵 가득 따른다. 마지막으로 잘 말린 쑥 한 잎을 넣어

충분히 우려낸다. 그런 다음 자세를 편히 하고 느긋하게 마시는 거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들어가는 재료 네 가지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의 맛을 지배하지 않도록 잘 배합하는 거다.

이 네 가지 재료의 조화와 균형 상태를 찾아내기 위해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지.


네 가지가 완전한 조화를 이룬 맛은 제법 음미해 볼 만하다. 혀 끝에서 살살 굴려 보면

4가지가 각각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때는 두 가지 또는 세 가지가 합성되어 나타나는

맛도 있고, 4가지를 다 합친 맛도 있지. 결국 계산에 의하면 이 4가지가 배합되어 나올 수

있는 맛은 15가지나 되지만, 우리 혀가 그것을 다 알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이 차의 맛을 헤아리는 시간이 나에게는 하루 중 가장

충만한 시간 중에 속한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국화꽃은 맛과 향이 떨어지는 조생종인데,

현재 향기가 뛰어난 만생종을 말리고 있으니 한 달 뒤에는 차의 맛이 도 달라질 거다.)





내가 야초차에 탐닉하게 된 것은 다 산야초 박사 장준근 씨 덕이다. 처음 야생초 연구에

눈뜰 무렵 교재로 사용한 것이 그분의 책<몸에 좋은 산야초>(석오 출판사)였거든.

이 책은 4분의 3이 화보이고 나머지가 해설인데, 이 해설이 학문적 지식을 나열한 게

아니고 산야초 미치광이 장 박사의 경험담과 지식을 적어 놓은 거라서 아주 실용적이었거든.

제대로 맛을 내려면 솥에 올려놓고 덖어야 하거늘 여기서는 꿈도 못 꿀 일. 그래도 말린

것으로나마 이만큼 즐길 수 있음에 감사드려야지.




 
 
 
 
  : 싱거운 밤
  : 봄 내음 잘 맡을께요.
 
2395
다연이엄마
야생초편지 - 17
02-26 오전
1247
다연이엄마
    [원님과 虎茶(호차)]
02-27 오전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