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한옥에 살았던 오래 전, 바람 한 점 없는 더위에도 시원하기만 한 대청마루에 누워 무심코 밖을 내다보면 뒤뜰 담장 밑의 장독대가 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나란히 놓인 장독대에서 어릴 적 숨바꼭질하다가 그만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항아리를 깨뜨렸던 일은 아련한 추억 속 한 장면이다. 그때 어머니는 왜 유독 장독대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까? 예로부터 장독대는 어느 집에서나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 왔다. 어머니는 “장맛이 변하면 집안이 기운다” 는 말을 경외하며, 집안 식구들의 건강을 의미하는 장독을 항상 정결히 하고 정성과 사랑으로 살폈다. “장맛을 보면 그 집안을 알 수 있다” 는 속담은 장맛이 단순한 솜씨이기보다 우리네 어머니의 정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말한다. 아마도 어머니는 자식들이 커 가는 것을 뿌듯해하듯이 장이 익어 가는 모습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셨던 모양이다. 간장, 된장, 고추장, 장아찌, 김치류, 젓갈류 따위를 담은 오지항아리나 독들을 놓아 두는 장독대는 양지 바르고 바람 잘 통하는 뒷마당 한쪽에 땅보다 조금 높게 돌을 쌓아 만들었다. 주위에는 벌레가 끼지 않는 나무를 심었으며, 부엌 가까운 뒤란이나 우물 주위에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옹색한 집에서는 처마 밑에 두기도 했고 안마당이 넓은 상류 가옥에서는 안마당 복판을 장독대로 쓰기도 했다. 장독들은 키가 높고 몸이 큰 것부터 뒤에서 앞쪽으로 나란히 놓아야 닦기 편하며 장을 떠내기도 쉽고 햇볕도 바르게 쬘 수 있었다. 흔히 장독대 옆에는 봉숭아나 해바라기, 분꽃을 심었는데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다섯 시쯤 피는 분꽃을 보며 밥을 지었던 어머니의 지혜가 담겨 있다. ‘장독대’는 중부지방의 말이고 북한에서는 ‘장독걸이’, 경상도와 남부 지역에서는 ‘장독간’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장항굽’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시집갈 규수를 보러 온 매파나 시집 식구들이 장독대 를 보고 그 집 주부의 규모와 사람됨을 알아보고 혼사를 결정했다고도 한다. 또한 장독대는 시집살이의 매운 맛을 안으로 삭이던 어머니들이 남몰래 서러움을 삼키던 곳이며, 술과 떡을 놓고 집안의 평안과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던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차츰 사람들이 편리함을 찾아 아파트로 이사가면서 이제 장독대는 물론 장독들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서서히 우리에게 잊혀져 가는 장독대의 풍경, 장독 그리고 장맛. 갈수록 사람들이 외롭고 고독한 이유는 아마 그 옛날 장맛을 잃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