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풀더미를 한 평만 떼어다 한 달 만에 새 안경을 끼니 세상이 훤한 게 달리 보이는구나. 그동안 안경다리가 부러져 십여년 전에 쓰던 뿌연 안경을 끼고 다녔더니 겉모습도 안경만큼이나 늙어 보였던 것 같다. 어제는 네가 면회 오기로 했던 날인데 사실은 사회참관을 나갔기 때문에 만약 오게 된다면 3시쯤에나 오라고 했던 것이다. 아니 오길 잘했다. 어제 갔던 곳은 2년 전에도 간 적이 있는 봉정사라는 절이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보다 오래된 고려조의 목조건물이 있는 곳인데, 실제 건물은 중간에 새 목재로 다 교체해 버린 데다 내부도 썰렁하니 헛간 같은 게 볼품이 없더라. 그에 비하면 무량수전의 기품 있는 모습은 과연 국보급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전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절 구경은 별로 하지 않고 절로 들어 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그저 땅만 보고 다녔다. 온갖 풀꽃들을 헤아리느라고 그랬지. 방에 앉아 있을 때 여러 권의 도감을 통해 그렇게 많은 풀꽃들을 보았는 데도 막상 산에 가 보니 온통 신기한 풀이 천지에 널려 있더라. 예전 같으면 그냥 "어, 풀 좋다!" 하고 지나쳤겠지만, 이번에는 풀 하나하나의 특성과 이름들을 주억거리며 헤쳐 나갔지. 그러자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한 신비의 곳간처럼 여겨지면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렇게 아쉽게 여겨질 수가 없더구나. 아침에 태풍이 지나가면서 많은 비를 뿌린 뒤라 산골짜기에는 계곡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도랑 근처에는 온갖 종류의 여뀌와 고마리가 잔뜩 꽃을 피운 채 곳곳에서 급류에 무더기로 흐느적거리고 있더구나. 어제 봉정사에 오를 때 눈에 가장 신선하게 들어온 풀꽃은 물봉선이었다. 봉숭아꽃을 닮았지만 봉숭아보다 훨씬 강렬하고 야성미가 넘쳐나는 꽃이지. 습지와 도랑에 많이 자라는데 산에 오르면서 가장 맘이 쏠리는 꽃이었지. 물봉선 사이사이로 그와 비슷한 붉은 꽃이 자주 눈에 띄길래 자세히 보니 배곯은 며느리가 밥알을 물고 죽은 자리에 피어났다는 며느리밥풀꽁이었다. 절 위쪽의 요사채로 오르는 길목에는 2년 전처럼 머위가 가득 자라고 있었다. 그때 머위 한 뿌리를 캐 와서 원예부 꽃밭에 심었더니(당시엔 봄) 가을에 녀석들이 엄청나게 번져서 그것을 뜯어다 된장을 풀어 머윗국을 끓여 먹은 기억이 난다. 산에 사는 스님들은 참 좋겠다. 지천으로 깔려 있는 온갖 신선한 야생초를 사시사철 맛볼 수 있으니 말이야. 산에서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이 풀 무더기를 한 평만 떼어다 교도소 운동장으로 옮겨 놓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운동시간 내내 그 풀밭에 머리를 박고 지낼 수 있을 텐데...... 하여간 하느님이 만드신 이 자연의 조화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 모든 조화를 모르고 그저 되는대로 흥청망청 살다 간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오는데 정말이지 길가의 풀꽃만도 못한 인간들의 행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라. 계곡 중턱에 있는 작은 폭포 위에 커다란 너럭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곁에 멋들어진 정자 하나가 그린 듯이 서 있었지. 이왕이면 정자에 한번 올라가 보자 하는 생각에 계곡을 건너는데, 정자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 먹다 만 도시락, 음료 깡통, 신문지 조각, 온갖 비닐 봉지 등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더라구, 게다가 악취까지....... 산에 와서 조물주의 조화를 감상하기는커녕 제 뱃속만 채우고는 사방에 똥칠만 해 놓고 내려오는 사람들. 이담에 그들이 같은 장소에 와서 자기가 버린 쓰레기를 보고 뭐라고 말할까? 아마 자신의 소행인 줄도 모르고 인상을 쓰면서 엉뚱한 사람에게 욕을 해대지 않을까? "엽전들은 이래서 안 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