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에서 눈이 부신 파란 하늘을 보았다. 맑고 드높은 가을하늘이다. 비닐 하우스에 널려져있는 빨간 고추들이 비들비들 햇살에 말라간다. 텃밭치고는 좀 큰 밭뙈기에 도시에 사는 형제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줄 고추 참깨 콩을 심었다. 그것 가지고는 양념도 모자랄 것이지만 나는 해마다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 .소일거 리로는 힘에 부친 농사이지만 이웃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럭저럭 농사 짓고 가을이면 추수를 한다. 우리 집에 놀러온 동생내외와 어머니는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고 나는 옥수수를 따고 있 었다. 고추밭 속에서 동생이나를 불렀다. 부르는 소리에 쳐다보니 빨갛게 익은 고추를 한 움 큼 따서 손에 쥐고 번쩍 올리며 이렇게 예쁜 것을 누가 고추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하는 거 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맞춤이라도 하는 양 동생의 표정은 아주 행복해 하고, 다른 밭고랑에 서 있던 제부는 장난기가 발동을 했는지 고추를 동생 목 언저리에 슬며시 갖다대 며 고추보다 더 예쁜 이름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한다. 자지러지게 웃어대는 웃음소리에 전봇대 위에서 낮잠을 즐기던 까치마저 놀라 깍깍거리며 고추밭을 한 바퀴 빙 돌고 날아간 다. 건들 부는 바람결에도 빠알간 볼로 부끄럼타던 동생은 소싯적처럼 수줍게 웃고있다. 곡 식과 채소에도 하나의 의미로 빛깔과 향기에 알 맞는 이름이 아주 예부터 붙어져 있었던 것 이 아니었나싶다. 가을햇살에 꾸밈없고 생긴 그대로의 모습으로 소중하게 다가오는 풍성한 들녘은 작년에 도 올해도 또 내년에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 모습이겠지만, 사람들은 세월 속에 묻혀 하 나둘씩 늘어나는 주름살을 지우며 젊어지고 싶어한다. 한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며 아름답게 늙어 가는 모습이 가을들녘처럼 아름다울 진데, 왠지 아름답게 쓰여지는 마음에 따라 그 사 람의 모습이 변하는 이치를 생각지 못하고 있음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여름이 남기고 간 긴 여울 속에 따가운 오후의 햇살이 떠밀려온다. 빨갛게 익은 고추와 고추잠자리가 어우러진 가을엔 내가 맑은 하늘에 마냥 목 타는 구름이 되고 싶다. 2003년 구월에